저 해와 달은 뿌리가 없다. 그러나 항상 규칙적인 듯 한 길을 맴돈다.
인간도 이를 닮았던가. 어머니와의 탯줄을 자르면서 뿌리 없이 외톨로 동서남북을 떠돈다.
그러면서 처자권속(妻子眷屬)을 부양(扶養)하고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치르다 보면
검은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저 언덕 위의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인생의 상궤(常軌)다. 이러한 인생의 상궤를 뒤집어 놓고 보면 ‘삶’이란 누구를 위해 슬퍼하고 기뻐할 것이며 또 누구에게 꺼벅 기울어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길목이 되기도 한다.
화가의 붓끝은 이 뿌리 없는 우리의 서글픔을 놓쳐서도 안된다.
— 서세옥
리만머핀 서울은 여름 기획전으로 한국 수묵 추상의 대가 고(故) 서세옥(1929-2020) 화백의 개인전을 갖는다. 2018년 뉴욕 웨스트 22번가에서 열린 리만머핀에서의 첫 개인전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지난 해 11월 향년 91세로 타계한 산정(山丁) 서세옥을 기억하며 그의 대표적인 인간 군상 작업 7점을 소개한다. 오랜 명상을 통해 인간/대상의 본질만을 고도로 정제된 점과 선으로 표현한 그의 <사람들> 연작은 일필휘지와 먹의 고아한 조화로움을 통해 감상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자유와 안식을 전한다.
서세옥은 본래 한학자이자 항일 지사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서예와 시에 능하였다. 문학에 뜻을 두었으나 미술로 진로를 바꾸어 194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아카데미로 개설된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제1회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정부수립 이후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창설된 1949년 제1회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재학생 신분으로 동양화 부문 최고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의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모두 겪은, 해방 후 1세대 작가였던 그는 일제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50년대 후반 서구의 미술사조가 빠르게 수용되었던 미술계의 시류에 자신만의 호흡으로 답하였다. 서세옥은 사대부 지식인들의 여가이자 수행의 일환이었던 서예와 시에서 유래한 ‘문인화文人畫’의 요소들을 재해석하며 동양화에서 추상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가 1960년 창립한 ‘수묵 숲 단체’라는 의미의 ‘묵림회墨林會’는 동양화단의 현대화를 위한 움직임으로 문인화풍 수묵 담채를 해체하거나 앵포르멜의 방법론을 다양하게 결합시킨 ‘수묵 추상’을 시도한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서세옥의 작업은 오랜 기간 다채롭게 시도된 지필묵의 물성과 붓을 움직이는 그의 호흡(정신)이 어우러져 생동한다. 그는 1957년 경을 기점으로 구체적인 형상 대신 ‘점’과 ‘선’을 변주하며 붓이 머금는 먹의 농담과 두께, 붓의 이동 흔적들을 실험한다. 이후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천착하게 된 ‘인간’이라는 주제는 더욱 정제된 점획과 번짐, 여백으로 구성된 일련의 <사람들> 연작으로 구현된다. 그가 세운 인간의 ‘상(象)’은 원형에 가까운 추상적 기호로, 맑고 짙은 먹의 번짐이 스치듯 머무르고 끊어질 듯 이어지며 관계와 움직임, 인류의 희로애락을 담아낸다. “점이 이어진 선들이 거대한 원을 이루고, 이 원은 출발점도 종착점도 없이 순환된다.”는 그의 설명은 최소 단위를 통한 무한의 가능성을 예고하고 인간이 자연과 동일한, 우주의 일부임을 상기시킨다. 나이, 인종, 성별의 구분이 없는 서세옥의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의 오랜 문화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그의 70여 년 화업의 정수이다.
작가 소개
산정 서세옥(1929년-2020년, 대구 출생)은 1950년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갤러리현대(2016), 국립현대미술관(2015), 미국 휴스턴미술관(2008), 일본 메종 에르메스(2007), 한국 대전시립미술관(2007), 의재미술관(2003) 외 주요 기관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미국 LACMA의 Beyond Line: The Art of Korean Writing(2019), 서울대학교 미술관의 Another History of Korean Contemporary Art(2016), College of Fine Arts Archives: Oriental Painting(2015), 삼성 리움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 전시 Beyond and Between(2014),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의 Then and Now: Celebrating 60th Anniversary of The National Academy of Arts of The Republic of Korea(2014), 경기도미술관의 Closer to Contemporary Art II- Abstract Art Is Real(2013), 부산비엔날레 Busan Biennale 2008: ART IS ALIVE(2008), 브라질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1963)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서세옥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2021년 금관문화훈장, 2012년 은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99년 제13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예술문화상 대상, 1994년 일민예술상, 1988년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학교 미술학 명예박사,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영국 대영박물관, 일본 후쿠오카미술관, 한국 호암미술관, 프랑스 문화부, 미국 휴스턴미술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미국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캐나다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한국 서울시립미술관, 서울대학교 박물관, 아트선재센터, 미국 USC 퍼시픽 아시아 박물관, 한국 원광대학교 박물관, 연세대학교 박물관 등 유수의 공공기관과 개인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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