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것들이 쌓이면 반복한다.
그리고 이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모한다.
— 로리엘 벨트란
리만머핀 서울은 베네수엘라계 미국인 작가 로리엘 벨트란(Loriel Beltrán)의 개인전 《완전한 붕괴 그 이면에 남는 것 Total Collapse》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열리는 작가의 첫 개인전으로, 그의 신작 여러 점을 한국에서 처음 만날 수 있는 자리이다.
벨트란은 예술 매체의 전통적 구분을 허무는 물감과 색상의 조각적 축적물을 창조한다. 회화와 조각의 개념을 시적으로 결합한 그의 작업은 “이미지가 되기를 거부”하고 대신 완전한 복합체로서 색을 구현한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벨트란은 작업을 통해 광학적 효과를 탐구하면서도 물질성, 제작 과정 그리고 산업의 문제들을 동등하게 살피며 예술적 노동과 그것이 남긴 잔여물을 전면에 드러낸다. 작가는 이미지와 오브제, 표면과 실체, 평면과 구조 사이의 경계를 압박하며 개념적 확장을 시도한다. 이와 같은 방법론은 작업을 라틴 아메리카 모더니즘의 유산과 미국 전후 회화의 교차점 상에 위치시키며 그에 수반하는 공통의 관심사들을 형성하고 있다.
정교한 노동 집약적 예술 실천을 통해 완성된 벨트란의 화면은 다층의 건조된 물감 축적물로 구성되며, 이로 하여금 작가는 움직이는 시각적 효과를 이끌어낸다. 그의 작업은 맞춤형 틀을 제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물감을 틀에 붓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감이 완전히 굳고 건조되면 이를 한 겹 더 쌓아 올린다. 때로는 층위 구도에 “단절”을 도입하기 위해 작업실의 남은 재료나 폐기물 등을 틀 안에 결합시기도 한다. 수개월 혹은 수년 간의 반복 과정을 거쳐 물감층이 하나의 소용돌이와 색층 덩어리로 축적 및 응집되면, 작가는 틀을 제거한 후 주문 제작한 기계를 이용해 이를 가느다란 조각으로 잘라낸다. 그리고 위와 같이 잘린 얇은 조각들은 평면적인 구성으로 나무 패널 위에 배열 및 부착된다. 과정에 있어 작품은 조각적 요소와 맞닿아 있으나 결과물은 벽면 위에 수직으로 걸리며 회화적 감상 경험을 선사한다.
《완전한 붕괴 그 이면에 남는 것》 전에서 벨트란은 축적된 지식의 보고로서 이미지의 역사를 논한다. 작가에게 있어 회화의 역사는 기법, 재료, 예술 사상과 관념이 응축된 고고학적 집합체로, 그는 화면 위에서 이를 해체하고 새로운 시각 체계로 재구성한다. <다이애나 I (르누아르) Diana I (Renoir)>(2023)는 벨트란이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탐구한 작품으로, 작가는 특유의 작업 방식으로 고전 회화를 소화시키며 이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더한다. 르누아르의 회화 속 다이애나는 벨트란의 작품에서 지시 코드로서 등장한다. 예컨대 리듬감 있는 녹색과 분홍색 영역은 원작 속 초목의 잎과 여신의 나체가 작가에 의해 조밀하게 중층화된 화면으로 변환된 결과이다. 이와 같이 벨트란은 새로 탄생하는 모든 작품이 미술사적 고전(canon)을 품은 하나의 압축판임을 제시한다. 한편 <지표들의 영역 a field of signs>(2022)에서 물감층은 알파벳을 연상시키는 산재된 시각적 기호들의 주변을 따라 수렴하고 압축된다. 논리적이면서도 비논리적인 <지표들의 영역>은 이미지와 언어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양자 모두 인류가 축적해 온 사회문화사 위에 구축된 담론적 결과물임을 밝힌다.
《완전한 붕괴 그 이면에 남는 것》 전에서는 인류의 역사 너머 환경과 생태학적 위기를 성찰한 작가의 은유적 비평도 확인할 수 있다. <대기의 붕괴 Atmosphere collapse>(2023)에서 벨트란은 선명한 화면 전체에 짙은 균열을 남긴 푸른색과 진홍색 스펙트럼을 통해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는 주거지의 취약성을 재고한다. 작가는 색이 지닌 광학적, 촉각적 특성에 오랜 기간 몰두해 왔다. 다양한 색소는 유기 원료에서 정제되거나 깊은 땅 속 광물로부터 추출된 물질이다. 색은 빛에 의해 발현하고, 눈을 통해 인지되지만, 근본적으로 실체적 물질과도 연결된다. <타르에서 나온 색소들 Pigments from tar>(2023), <아닐린 빛 Aniline light>(2023)과 같은 작품은 이러한 태곳적 역사를 새롭게 가시화하고, 햇빛과 퇴적물의 화학 반응을 만화경처럼 조망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그의 회화에서 보이는 물감층은 지층을 연상시킨다. 이와 같은 환경 문제에 대한 폭넓은 탐구와 제작 과정을 통해 작품은 유구한 지질학적 시간과도 연결된다.
이번 전시에 선보여진 벨트란의 최신작은 위험할 정도로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을 위해 구축된 여러 범주들 간의 경계를 밀어붙이며 개념의 한계를 실험한다. 자연과 문화, 과학과 철학, 언어와 이미지, 조각과 회화는 재료와 레퍼런스의 혼합으로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는 벨트란의 예술 실천에 있어 주요한 대상이다. 이와 같은 방법론을 통해 우리는 전시 전반 걸쳐 기존 정의가 점차 와해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급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완전한 붕괴 그 이면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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