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만머핀 서울은 리만머핀에서 선보이는 하이디 부허(Heidi Bucher)의 두 번째 개인전 《란사로테 Lanzarote》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부허가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의 작은 섬 란사로테에서 생애 마지막 10년(1983-1993)을 보내며 남긴 후기 작업을 조명한다. 작가가 고안한 상징적인 문 ‘스키닝(skinning)’ 작업을 엄선하여 선보이는 《란사로테》는 수십 년에 걸쳐 건축, 신체와 이를 둘러싼 환경의 교차점을 탐구한 작가의 수행적 실천 그 마지막 장을 살핀다. 전시는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부허의 아시아 첫 회고전인 《공간은 피막, 피부 Spaces are Shells, are Skins》에 뒤이어 개최된다.
하이디 부허는 건축 요소의 물리적 구조와 인체의 유사성을 밝히는 라텍스 캐스팅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업에서 집은 내부를 둘러싸고 보호하는 피막으로, 인간의 피부와 같다. 작가는 라텍스가 건조되면 마치 살갗 같은 색상, 질감 및 유연성을 띠게 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위 개념을 명시적인 시각적 은유로 변화시킨다. 부허가 ‘집의 피부(Hauträume)’라 지칭한 건축적 캐스팅 작업은 그의 부모님과 조상들이 살던 집이나 작가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공간을 주 대상으로 한다. 작업은 낡은 ‘피부’를 벗겨 내고 오랜 장소를 뒤로하는 부허의 사적 ‘허물벗기[脫皮]’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특정 장소에 깊이 뿌리내린 개인의 역사와 문화사를 기념한다. 이와 같은 작가의 실천은 건물과 피부, 주체와 객체, 공과 사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분명한 페미니스트적 접근 방식을 취한다.
스키닝 작업을 위해 부허는 조수와 함께 주물을 뜰 구조면에 거즈 천을 덮고 액체형의 라텍스를 바른다. 건조 과정에서 라텍스가 완전히 응고되면 그는 피부 층을 벗기듯 이를 구조물에서 뜯어내고, 그 결과물로 원래 대상의 형태 및 질감을 보존하는 반투명한 피부 같은 재료의 일부를 얻게 된다. 작품은 면밀하게 계획된 단단한 건축의 본질을 드러내는 동시에 부드럽고 유연함을 겸비한다. 피부 노화와 마찬가지로 라텍스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각적 변화가 두드러지는데, 짙은 암갈색으로 어두워지고 경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부허의 캐스팅은 이와 같은 과정의 흔적을 드러내며 사람의 피부가 한 생애를 기록하고 이야기하듯 표면에 시간의 지표를 남긴다.
1980년대 초부터 부허는 란사로테에서 점차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건조한 화산암 풍경 위에 펼쳐진 파란색과 하얀색 건축물은 작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선사했다. 부허에게 있어 란사로테는 일종의 창조적 은신처가 되었고, 결국 그는 코스타 테기세(Costa Teguise)에 집을 장만하기에 이른다. 작가는 이 시골집에 팔라시오 이코(Palacio Ico)라는 이름을 붙여 수도와 전기가 단절되는 상황에서도 그곳에서 생활하며 작업을 이어나갔다. 팔라시오 이코는 그 시기 스키닝 작업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부허는 건물의 각종 문에 특히 이끌렸는데, 녹청이 생긴 양쪽 문 표면에는 내부 목재 질감이 간헐적으로 노출되었고, 산화로 인한 다양한 음영의 청록색은 신비로운 빛깔을 띠었다. 작가는 1993년 작고 직전까지 팔라시오 이코의 스키닝 작업을 반복하며 문과 발코니, 외부 건축 요소의 라텍스 캐스팅 작업을 다량 남겼다.
부허의 <무제(팔라시오 이코의 문)>(1986)는 뚜렷한 녹청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라텍스가 굳을 때 녹이 슬어 부서진 잔해와 페인트가 라텍스에 달라붙으며 현재까지도 작품 표면에 남게 되었는데, 이러한 흔적은 역사성을 지닌 사물의 지표적 요소들을 갤러리 공간으로 가져와 다시 한 번 일깨운다. 작품은 시간이 지날 수록 우아하게 변형되며 얼룩과 나무 조각이 섞인 녹청색으로 점차 짙은 색을 더해 간다. 각각의 문은 이전 장소의 문화사와 그 제작자의 개인사를 모두 담고 있다.
《란사로테》에서 선보이는 문 스키닝 작업은 부허의 마지막 유작에 속한다. 마치 유령처럼 부유하는 팔라시오 이코의 문은 창조와 파괴, 내구와 퇴화,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상태를 암시한다. 부허는 자신의 창조력이 발휘된 마지막 장소가 된 팔라시오 이코의 문들을 주물로 뜨며, 마지막 허물벗기와 이에 따른 탈바꿈이라는 최종 문턱을 넘어선다. 《란사로테》의 작업은 부허의 예술적 경력에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작품에 보다 새롭고 광범위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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