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 부허(1926년 스위스 빈터투어 출생, 1993년 스위스 브루넨 작고)는 라텍스를 혁신적으로 사용하여 신체와 주변 환경의 물리적 경계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작가가 창안한 ‘집의 피부’는 역사의 보존과 은유적 의미로서 탈피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고, 개인과 신체 및 과거의 복잡한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로도 작용한다. 작가는 미국, 스위스와 카나리아 제도를 넘나들며 가족, 문화, 건축의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고 공적·사적 공간과 여성성, 신체의 경계에서 대두되는 문제들을 관통하는 작품 세계를 구축하였다. 초기 드로잉과 ‘입을 수 있는 조각(wearable sculptures)’에서부터 후기 라텍스 작업과 ‘집의 피부’까지 이르는 그의 전방위적 작업은 작가의 다양한 예술적 관심을 반영하는 한편 공통적으로 신체와 공간에 대한 그의 오랜 철학을 대변한다. 이는 작가가 “공간은 피막, 피부(Räume sind Hüllen, sind Häute)”라 표현한 것과도 상통한다.
부허는 1970년대부터 라텍스와 자개 안료를 혼합한 용액으로 옷을 방부 처리하여 시간의 기억을 담은 물건들을 보존하고 이를 피부와 같은 색상과 질감을 가진 조각으로 제시했다. 작가는 어릴 적 경험한 성별에 따른 엄격한 사회적 제한에 대항하여 잠옷, 스타킹 등의 여성 의류를 초기 작업 대상으로 삼았다. 1970년대 말부터 그는 라텍스를 실내 사물과 공간 표면에 바르는 것으로 작업의 범위를 확장했고, 여성의 사적 옷가지를 ‘여성적’ 공간과 연결시켰다. 액체형 라텍스를 바르고 말렸다가, 단단하게 굳어진 라텍스를 다시 뜯어내는 과정을 통해 작품은 당시 페인트, 녹, 먼지, 그리고 건축물의 미세한 무늬와 흔적이 그대로 남은 반투명한 피막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 후 몇 년간 부허는 자신의 과거와 관련된 실내 공간, 예컨대 빈터투어에 있는 조상 대대로 살던 집과 아버지의 서재, 취리히에 있는 작가 스튜디오 등을 소재로 한 여러 주요 작품을 제작한다. 작품에서 그가 거주했던 사적 공간들은 취약한 라텍스 소재의 특성상 마치 시간이 지날 수록 뒤틀리고 변색되는 기억처럼 유령 같은 반투명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공중에 매달려 전시되는 ‘집의 피부’ 작업들은 기념비적인 동시에 섬세하다. 이는 라텍스를 건축면에서 뜯어낼 때 상당한 힘과 정교함을 요하는 제작 과정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허의 후기 작업은 스위스의 호텔, 정부 청사, 정신요양시설과 같은 공적 공간으로 더욱 확장되었다. 오늘날 그의 작업은 다양한 드로잉과 조각, 미완성 유고작을 비롯해 작가의 라텍스 작업에 관한 중요 기록 자료로도 활용되는 사진 및 영상으로 남아 있다.
하이디 부허는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취리히 미술공예학교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작가의 주요 개인전은 최근 개최된 서울 아트선재센터(2023)를 비롯하여 스위스 체르네츠의 수쉬 미술관(2022), 스위스 베른 미술관(2022), 독일 뮌헨의 하우스 데어 쿤스트(2021), 영국 런던의 디 어프로치(2019), 미국 뉴욕 리만머핀(2019), 런던 파라솔 유닛(2018), 뉴욕의 스위스 인스티튜트(2014), 프랑스 파리의 스위스 문화원(2013), 스위스 취리히의 미그로스 현대미술관(2004), 스위스 바르트-바이닝엔의 투르가우 미술관(1993),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1972), 캐나다 몬트리올 현대미술관(1971), 뉴욕 현대 공예 박물관(1971) 등에서 개최되었다.
그의 작품이 소개된 대표적인 그룹전으로는 리만머핀 런던의 《Beneath the Surface》(2023)와 리만머핀 팜비치의 《Currents》(2023)를 비롯해 취리히 디자인 박물관의 《Textile Garden》(2022), 프랑스 덩케르크 노르파드칼레 현대미술 지방재단의 《GIGANTISME — ART & INDUSTRIE》(2019), 프랑스 그르노블 르 마가장 국립현대미술센터의 《Entropy, I write your name》(2019), 독일 바덴-바덴 시립미술관의 《The Psyche as Political Arena》(2019), 런던 자블루도비츠 컬렉션의 《In the Shadow of Forward Motion》(2019), 영국 노팅엄 컨템포러리의 《An Intricate Weave》(2018),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현대미술관의 《The Everywhere Studio》(2017), 프랑스 파리 조폐국과 미국 워싱턴 D.C. 국립 여성 예술가 미술관의 《Women House》(2017), 제57회 베니스 비엔날레 《Viva Arte Viva》(2017), 이스라엘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의 《No Place Like Home》(2017), 영국 워릭 아트 센터의 《Room》(2017), 프랑스 파리 파비옹 드 라스날의 《Artists and Architecture: Variable Dimensions》(2015) 등이 있다.
부허의 작품은 전 세계 유수의 공공 및 사립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표 소장처로는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프랑스 파리 및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소재의 카디스트 예술재단, 로스앤젤레스의 해머 미술관, 스위스 브베 제니쉬 미술관, 빈터투어 미술관, 취리히의 미그로스 현대미술관, 런던 자블루도비츠 컬렉션, 이스라엘 박물관 등이 있다.